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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은 완성됐지만 서사는 비어 있는 정원, 김천 연화지

로컬 탐방

by 스토리그래퍼 구자룡 2025. 11. 2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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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문안 길에 우연히 만난 로컬 정원
농업용 저수지에서 사계절 시민 정원으로
숨은 스토리를 드러낼 때 완성되는 로컬 브랜드

 

우연히 찾은 김천시 교동 연화지는 한때 농업용 저수지이자 오염과 악취로 외면받던 공간이었다. 지금은 벚꽃과 연꽃, 단풍을 품은 ‘도심 속 정원’이자 시민들의 산책로, 사진가들의 촬영 포인트, 청춘들의 데이트 코스로 사랑받는다. 그러나 이 변화를 만든 주민들의 묵묵한 노력과 초대 금산동 시의원 등의 숨은 이야기는 현장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연화지를 단순한 포토 스폿이 아닌, 진정성 있는 로컬 정원 브랜드로 완성하기 위해 무엇을 기록하고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았다.

 

늦가을 연화지 전경. 마른 연잎과 단풍이 어우러져 도심 속 작은 정원 풍경을 만든다.(사진: 구자룡)

 

 

뜻밖의 발견, 연화지의 늦가을 단풍

친구가 김천시의 한 병원에서 수술로 입원했다. 병문안을 계기로 김천을 찾게 되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라 잠깐 둘러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는 장소를 검색했다. 병원 근처에 ‘연화지’라는 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알고 보니 연화지는 ‘대한민국 밤밤곡곡 100선’에 선정된 곳이다. 벚꽃 명소로만 연간 25만 명이 찾는다고 한다. 벚꽃, 연꽃, 단풍, 설경까지 사계절 내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자주 등장하고, 데이트 코스로도 입소문이 난 곳이다. 이런 곳을 이제야 알다니, 병문안 길에 뜻밖에 발견한 김천의 로컬 핫플레이스였다.

 

도착했을 때는 막 점심시간이 지난 시각이었다. 식사 후 산책을 나온 사람들, 인근 주민으로 보이는 부부와 할머니들이 둘레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삼각대를 설치하고 연못을 촬영하고 있으니 동네 중학생들이 다가와 인사하고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 눈빛이다. 지나가던 중년 여성 한 분이 “저기 연못 안에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은 뭐 하는 건가요?”라고 묻는다. 사진가라면 알 것 같다는 듯. 지나가던 중년 아저씨는 어릴 적 소풍 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옛날엔 여기 자주 왔었다”고 회상한다.

 

둘레길을 걷는 시민들. 일상 속 쉼표 역할을 하는 동네 정원의 얼굴이다.(사진: 구자룡)

 

 

이미 가을의 절정은 지난 시점(2025.11.15)이었다. 단풍이 남아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늦은 때라는 건 결국 마음속 기준일 뿐이라는 걸 다시 느꼈다. 곳곳에 남은 단풍은 여전히 곱고, 연못 위로 드러누운 마른 연잎들이 줄지어 선 모습도 사진으로 담기에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사실 이곳을 찾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저수지 수면 위로 비치는 반영을 ND 필터를 이용해 찍어 보고 싶어서였다. 막상 와 보니 연이 자라 꽃을 피우고 사라지기 전에는 그 ‘완벽한 반영’을 담기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신 연못을 가득 채운 마른 연잎과 줄기들이 프레임의 구조와 공간감을 풍성하게 채워 주었다. 첫인상은 분명했다. 가볍게 산책하며 대화하기 좋고, 사진 찍기에도 좋은, ‘동네 정원 같은 연못’이었다.

 

연꽃 철이 지난 뒤 남은 줄기와 잎. 사계절 내내 표정이 바뀌는 연화지의 시간을 보여준다.(사진: 구자룡)

 

 

저수지에서 정원으로, 연화지를 만든 사람들

김천시청 홈페이지에서 연화지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연화지는 조선 시대 초에 농업용수 관개지로 조성되었던 저수지였다. 물이 맑고 경관이 좋아 풍류객들이 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봉황대라는 정자를 지어 시를 읊고 술잔을 기울이며 노닐던 곳이었다.” 현재 저수지 둘레는 약 600m로 크지 않지만, 산책하기에 알맞은 규모다. 주변으로 아파트와 민가가 둘러서 있고, 저수지를 따라 식당과 카페가 줄지어 있다.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에는 여느 벚꽃 명소처럼 인파가 몰린다. 연못 주변은 사람들로 붐비고, 주차난은 일상이 되며, 푸드트럭과 프리마켓이 더해져 꽤 복잡한 풍경이 펼쳐진다. 요약하자면, 연화지는 조선 시대 농업용 저수지에서 출발해, 지금은 사계절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심 속 정원 겸 휴식공간이 되었다.

 

연화지라는 이름에도 이야기가 있다. 1711년 부임한 김산 군수 윤택이 어느 날 꿈에서 솔개가 봉황으로 변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저수지에 ‘솔개 연(鳶)’, ‘바뀔 화(嘩)’를 써서 ‘연화지(鳶嘩池)’라고 붙였다고 전해진다. 한글만 사용하는 지금의 감각으로 보면 대부분 ‘연꽃이 있는 연못’이라는 의미의 ‘연화지(蓮花池)’를 떠올린다. 현실적으로도, 브랜드 네이밍 관점에서도 후자가 더 자연스럽다. 과거의 정체성은 역사로 남기되, 현재의 연화지는 이미 연꽃과 벚꽃이 사계절을 장식하는 시민 정원에 가깝기 때문이다.

 

연못 한가운데 봉황대 정자. 연화지의 옛 정취를 더해 준다.(사진: 구자룡)

 

그러나 이 저수지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의외로 최근의 일이다. 농업용 저수지의 기능이 사라지면서 연화지는 한때 오염이 심해지고 악취가 나는 혐오시설로 전락했다. 지금의 연화지로 다시 태어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의 손과 시간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 중요한 스토리를 현장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김천시의 공식 소개는 앞서 인용한 두 문장이 전부다. 겉에서 보기 좋은 한 단면만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누가 이 정원을 만들었는가.’

 

연화지라는 이름만 보면 연꽃이 떠오른다. 실제로 저수지 전체에 연이 심어져 있다. 그렇다면 누가 연을 심었을까? 누가 저수지 둘레에 벚나무를 줄지어 심었을까? 연화지를 연꽃과 벚꽃이 가득한 ‘정원’으로 기획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들)의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지역 신문에서 ‘김천 연화지에 숨은 사연’을 다룬 기사를 찾았다. “연화지의 아름다운 벚꽃이 예전부터 있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현재의 연화지는 박광화 초대 금산동 시의원과 교동·금산동 새마을 지도자와 부녀회를 비롯한 주민들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물이다.”

 

1990년대 초, 오염으로 악취가 나던 저수지를 준설하고 어린 벚나무를 심은 것이 지금 연화지의 출발점이었다. 좋은 스토리에는 대개 역경을 이겨낸 과정이 들어 있다. 연화지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벚나무는 직경 5cm를 시청에 요구했으나 예산 문제로 직경 3cm짜리를 심기도 했다. 주변 학생과 아이들이 어린 벚나무를 꺾거나 가지를 찢으면 새벽에 나와 노끈으로 묶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가로등도 예산이 부족해 뜨문뜨문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자비를 들여 주민들과 국수를 삶아 식사를 대신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연화지는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정체성은 현장에서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정확한 전말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이 숨은 스토리가 언젠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이유다.

 

단풍으로 붉게 물든 가을날의 연화지. 주민들이 정성스레 심고 지켜온 벚나무가 만들어 낸 풍경이다.(사진: 구자룡)

 

 

로컬 브랜드의 진정성과 정원으로써의 연화지

브랜드가 지속 가능하려면, 그 브랜드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하고, 사람들이 그 스토리에 공감해야 한다. 연화지는 안타깝게도 역사적인 스토리만 전면에 나와 있다. 현판에 적힌 유래는 지나가는 이들이 한 번쯤 읽어 볼 수는 있지만, 마음에 오래 남기는 쉽지 않다. 조선 시대 어느 군수가 꿈을 꾸었고, 정자를 옮기고, 시를 짓고, 김천시에서 일부 비용을 부담했다는 이야기에서 전율을 느낄 사람은 많지 않다.

 

반대로, 지금 연화지를 현재형으로 만든 감동적인 스토리는 제대로 소개되지 않고 있다. ‘진정성 있는 스토리’는 로컬 브랜드의 핵심이다. 없는 이야기를 억지로 꾸며 내기도 하는 시대에,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살리지 못한다면 그건 로컬 브랜드 전략의 한계다.

 

연화지의 미래 정체성은 ‘저수지’가 아니라 ‘정원’에 더 가까울 것이다. 벚꽃과 연못, 정자가 있는 작은 섬은 주민들에게는 일상적인 휴식공간이자, 여행객에게는 짧은 힐링의 장소가 된다. 청춘들에게는 데이트 코스로, 사진가에게는 사계절 내내 찾아오고 싶은 촬영 포인트로 기능할 수 있다. 문제는 이미 너무 유명해진 만큼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이 공간을 운영할 것인가이다. 주변 식당과 카페, 푸드트럭과 각종 상업시설이 늘면서 자칫 ‘상업화된 포토 스폿’으로만 소비될 위험도 있다.

 

한국 정원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로 흔히 ‘차경(借景)’을 말한다. 주변 경관을 빌려와 정원의 일부로 만드는 방식이다. 조선 시대 정치가와 선비들도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정자를 옮겨 지으며 연화지를 공공이 이용할 수 있는 정원으로 활용했다. 근래에는 김천시가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재조성했고, 동네 주민들이 몸으로 힘을 보태 지금의 연화지가 되었다. 이제 연화지는 모두가 누리는 공공 정원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었다. 봉황대 정자를 상시 개방해야 진정한 차경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정자는 대부분 특정 집안의 사유재산이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반면 곤지암의 화담숲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정원이지만, 관람을 마칠 즈음에는 이 숲을 만든 이와 그 철학을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된다. 조성 연유와 탄생 배경을 돌에 새겨 넣었고 포토존을 만들어 놓았다. 공간과 스토리가 함께 기억에 남는다.

 

화담숲 건립 취지를 설명하는 글이 새겨진 기념비. 화담숲을 조성한 구본무 회장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며, 포토존의 역할도 한다.(사진: 구자룡)

 

연화지에서는 어딘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여행자 입장에서, 그냥 풍경을 구경하고 잠깐 쉬어 가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이 장소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사람들의 노고와 앞으로 연화지가 지향할 미래에 대한 메시지가 함께 드러난다면 어떨까. 연화지는 더 단단한 로컬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정원으로써 연화지가 남겨야 할 것

연화지는 이미 ‘사진 찍기 좋은 장소’를 넘어 ‘동네 정원’이자 ‘도시의 얼굴’로 기능하고 있다. 남은 과제는 이 공간의 진정성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이다. 연화지를 만든 사람들의 이름과 당시의 사연, 주민들이 함께 힘을 모았던 순간들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시작된다.

 

연화지를 거닐다 보면, 물 위에 비친 봉황대와 벚나무, 연잎과 단풍, 주변 아파트의 실루엣이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 이 풍경이 일회성 포토존이 아니라, 지역 주민과 방문객 모두에게 의미 있는 ‘로컬 정원’으로 남을 수 있도록, 이제는 하드웨어를 넘어 스토리와 경험, 운영 방식까지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연화지의 반영이 만들어낸 수채화. 마른 연잎과 벚나무 단풍이 수면위에 반영을 만든다.(사진: 구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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