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은 흔히 ‘K기업가정신이 태동한 마을’로 불린다. LG·GS·LIG 등 굵직한 재벌가 창업주들의 생가가 모여 있고, ‘부자마을’이라는 별칭까지 따라붙는다. 기업가정신을 공부하는 사람들, 부의 상징을 현장에서 느껴보려는 방문객들이 매년 이곳을 찾는다.
그러나 현장에서 마주한 풍경은 기대와 달랐다. 생가들은 대부분 사람이 살지 않는 채 대문이 닫혀 있었고, 마을 안 카페도 문을 열지 않았다. 마을은 정비돼 있었지만, 살아 있는 마을이라기보다 ‘관리되고 있는 공간’에 가까웠다. 로컬브랜드로 지속되기 위한 동력이 보이지 않았다.
승산마을의 역사는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초 김해 허 씨가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고, 이후 능성 구 씨가 사위로 들어오면서 두 가문이 양반 문화를 뿌리내렸다. 방어산을 등지고 남강이 흐르는 배산임수 지형 덕에 예로부터 명당으로도 알려졌다. 여기에 LG그룹 공동 창업주 구인회와 허만정, GS그룹 창업주 허창수, LIG그룹 창업주 구자원 등 12명의 재벌 회장 생가가 한 곳에 모여 있으니, ‘기업가정신의 뿌리 마을’이라는 서사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승산마을의 생가와 한옥들(사진: 구자룡)
: 12명의 대기업 회장 생가가 한옥 형태로 모여 있는 구역. 관리 문제로 대부분 대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서 체험하는’ 구조는 아니다.
이 서사를 확장해 주는 공간이 폐교된 옛 지수초등학교다. 이 학교는 1980년대 한국 100대 재벌 중 30여 명의 출신 학교로 기록돼 있다. 진주시와 한국경영학회는 이곳을 ‘K-기업가정신센터’로 리모델링하고, 진주시를 “대한민국 기업가정신 수도”로 선포했다.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지은 상남관도 지금은 '기업가정신 전문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K-기업가정신센터와 부자나무 (사진: 구자룡)
: 폐교된 지수초를 리모델링해 만든 기업가정신 교육·전시공간. LG 구인회 회장, 삼성 이병철 회장, 효성 조홍제 회장이 지수초에 다니던 1922년에 심었다는 ‘부자나무’ 스토리가 더해져 상징성이 커졌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스토리와 상징은 충분하지만, 방문객이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와 동선이 얇다는 점이다. 대문이 굳게 닫힌 생가를 담장 밖에서 훑어보는 것으로는 ‘재벌가의 기운’을 체감하기 어렵다. 쉬어갈 카페, 지역 식재료를 맛볼 식당,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는 민박이 연결되지 않으면 체류 시간은 짧아지고 재방문 의사는 떨어진다. 체류형 로컬브랜드가 아니라 ‘한 번 다녀온 곳’으로 소비되는 구조다.
비슷한 시기 조선 양반마을로 관광자원화에 성공한 경주 양동마을과 비교하면 차이가 더 뚜렷하다. 양동마을은 주민이 민박을 운영해 마을에 생활 온기가 있다. 전통민박 체험과 전통문화 체험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있다. 식·주가 마을 안에서 해결되기 때문에 방문이 ‘체험’으로 전환된다. 반면 승산마을은 개방돼 있고 입장료도 없지만, 막상 가보면 체험·학습·소비로 이어지는 브랜드 여정이 설계돼 있지 않다.

경주 양동마을 한옥에서 진행된 어떤 세미나 (사진 : 구자룡) (사진 : 구자룡)
: 양동마을 안에서 세미나, 민박, 현지 식재료의 식사가 가능하다. 그리고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체류형 체험 공간으로 문화유산을 유지하고 있다.
로컬브랜드 관점에서 보면 승산마을의 본질적 정체성은 매우 훌륭하다. ①양반·가문 스토리, ②재벌가 생가, ③명당으로서의 지형, ④기업가정신으로 이어지는 현대사까지 한 마을 안에 묶여 있다. 문제는 이것을 현재의 방문객, 미래의 학습자에게 어떤 형태로 ‘제안’할지에 대한 구성적 정체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여기가 부자마을입니다”라는 설명만으로는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해법은 이미 마을 안에 있다. 승산마을이 가진 가장 현대적인 자산은 ‘K-기업가정신’이다. 진주시가 아무리 “기업가정신 수도”를 선포해도, 그 정신을 계속 생산하는 프로그램이 없으면 현장은 박물관처럼 굳는다. 이제는 건물과 시설을 보수하는 하드웨어형 접근에서, 그 공간에서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지’를 설계하는 소프트웨어형 접근으로 전환할 때다.
예컨대 기업가정신 전문도서관과 한옥 스테이를 연계해 ‘경영서 한 달 집필 레지던시’를 운영할 수 있다. 이미 한옥 고가를 리모델링한 한옥스테이와 한옥의 정신을 잇는 현대식 목구조 공간인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서 한 달 살기가 가능하다. 예비창업자·개발자·디자이너를 불러 스타트업 해커톤을 개최하고, 그 결과를 매년 아카이브 하는 연차 포럼을 열 수도 있다. “한국 기업가정신이 시작된 마을에서 나의 첫 비즈니스를 설계했다”는 서사가 쌓이기 시작하면, 승산마을은 과거의 유산을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기업가정신을 지금도 배양하는 현장으로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축은 체류형 한옥 활용이다. 재벌 생가를 전면 상업화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부자의 기운을 받고 싶다’는 수요는 실제로 존재한다. 일부 한옥 생가를 체험형 민박, 작가·연구자 임시거주 공간으로 운영하면 주민 소득과 관계인구가 동시에 늘어난다. 집은 사람이 드나들 때 더 잘 보존된다.
결국 승산마을이 로컬브랜드로 지속되려면 “여기가 옛 재벌가 마을입니다”라는 설명을 넘어, “그래서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나”를 보여줘야 한다. 역사와 상징은 충분하다. 이제는 사용성과 참여성을 더해야 한다. 닫혀 있는 문을 조금만 열어도 브랜드는 다시 숨을 쉰다.

기업가정신 전문도서관인 ‘상남관’ 내부 (사진: 구자룡)
: 구자경 명예회장이 지은 체육관을 리모델링한 공간. 경영·기업가정신 도서가 비치돼 있어 레지던시형 프로그램과의 연계 잠재력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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